조선도공 400년의 명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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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심당길 (当吉)
심당수 (当壽)
심당길 [도일(陶一)]
심도원 (陶円)
심당길 (当吉)
심당관 (当官)
심당수 (当壽)
심당원 (当円)
심당영 (当栄)
심당근 (当近)
심십신 (十信)
심수관 (壽官)
심수관 [정언(正彦)]
심수관 [혜길(惠吉)]
심수관 [일휘(一輝)]
히바카리다완 火計り茶碗
히바카리다완(火計り茶碗)은 1598년 겨울, 정유재란의 끝이 보일 무렵 일본으로 끌려간 선조 심당길(沈當吉)의 작품이다.
히바카리(火計り)는 ‘불(火)만 ’이란 뜻으로, 흙과 유약, 그리고 도혼(陶魂)은 조선의 것이고 오직 ‘불’만 일본의 것을 썼다는 뜻이다.
초대 심당길
(沈當吉)
1598년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자 사쓰마(薩摩, 현 가고시마) 번주였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는 전라도 남원 지역의 조선도공 80여 명을 납치해 끌고 갔다. 청송 심씨의 12대손 심당길(沈當吉)도 이들 중 한명이었다. 심당길의 본명은 심찬(沈讚)이었으며, 포로로 잡힌 것을 수치스러워하며 평생 아명인 당길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처음 정착했던 곳은 쿠시키노(串木野)였으나 원주민들과의 마찰 끝에 1603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현 거주지)로 이주한 후 나에시로가와(苗代川) 가마를 개관하였다. 그리고 고생과 노력 끝에 박평의(朴平意)와 함께 백토를 찾아냈으며, 그 결과 현재의 사쓰마야키(薩摩窯)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13대 심수관
(沈 正彦, 1889-1964년)
교토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후 심수관가의 전통을 이어 국내외 여러 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는 등 도공으로서 빛나는 일생을 보내다 1964년 4월1일 75세를 일기로 작고하였다. 그러나 그가 활동했던 시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쳐 1910년 한일강제 병합, 그리고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혼란의 시대였다. 이와 같은 가혹한 상황아래에서 심수관요를 지킨 것이 13대 심수관이었다. 또한 14대 심수관에게 다음과 같은 유명한 유언을 남겼다. “네 아들을 도공으로 만들어라. 내가 할 일도 그것뿐이었고, 네가 할 일도 그것뿐이다”
15대 심수관
12대 심수관
(沈壽官, 1835-1906년)
오랜 기간 명맥을 유지해오던 사쓰마야키는 1875년 메이지 유신으로 번영도자기처(藩營陶磁器處)가 폐지되면서 위기를 맞이하였으나 12대 심수관은 사재를 털어 번에서 운영하던 도자기 공장을 직접 인수하여 교쿠코잔(玉光山) 도기제조장을 창업하였다. 현재 심수관요의 원형이 된 것이 바로 이 교쿠코잔 도기제조장이며, 이후 사쓰마야끼의 전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와 1873년 빈 만국박람회,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 도자기를 출품해 서구사회에 ‘사쓰마웨어’ 선풍을 일으켰다. 투각기법과 부조기법, 장식물(捻り物)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하여 사쓰마야키의 기술 혁신을 일으켰다.
14대 심수관
(沈惠吉, 1926-2019년)
와세다대학 정경학부 졸업 후 한때 정치에 뜻을 두어 국회의원 비서로 일하기도 했으나 부친의 병환으로 낙향하여 도예수업을 쌓았다. 1964년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14대 심수관이 되었다. 일본의 유명한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는 소설 <고향을 어찌 잊으리(故郷忘じがたく候)>를 통해 심수관가의 도자기에 얽힌 애환, 가문의 전통과 조선 도공의 예술혼을 지키려는 노력 등을 대중들에게 알렸고, 그 결과 심수관가는 대중적인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과 일본 양국의 문화 교류, 친선에 많은 공헌을 하여 1988년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대한민국 명예총영사로 임명되었으며, 1999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沈一輝, 1959년-)
와세다대학 교육학과를 졸업하였다, 대학을 마친 후 가업을 잇기 위해 교토부립도공고등기술전문교(京都府立陶工高等技術専門校)를 마치고 다시 이탈리아로 유학하여 파엔자 국립미술도예학교 (Gaetano Ballardini)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다시 경기도 여주에서 김일만(金一萬,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선생에게 옹기 제조법을 사사하였다. 이렇게 전문적이고도 다양한 도자기 수업을 마친 후 1999년 1월15일, 15대 심수관이 되어 400여 년을 이어온 가업을 승계해 발전시켜 나가고 있다.
400여 년 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혼란 속에서 납치된 수많은 조선인들은 일본 땅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해나가야 했다. 낯선 환경과 싸워야 했고, 원주민들의 박해를 견뎌내야 하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피납된 조선인들 중 사쓰마(薩摩, 현재의 가고시마)의 나에시로가와(苗代川)라는 지역에 집단 이주된 사람들은 ‘조선인 마을’을 이루고 사쓰마야키(薩摩焼)라는 새로운 도자기 전통을 만들어냈으며, 일본의 도자기 산업과 문화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사쓰마야키의 대표적인 명문가가 바로 심수관 가문이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당시 시마즈군의 조선 침략 경로
초대 심당길이 쓰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망건
심수관가문의 가보로 습명식을 통해 후세로 전해지고 있다
초대 심당길이 사쓰마로 납치될 때 가져왔다고 전해지는 귀면
단군을 모신 사당 옥산궁
(玉山宮)
나에시로가와에는 일본으로 끌려와 정착한 도공들에 의해 건립된 옥산궁이 있었다. 이곳에서는 해마다 음력 8월 14일에 한복으로 정장한 도공들과 그 가족들이 고국에 돌아갈 수 있게 해 달라는 기원과 함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당시 제사에서는 신무가 (神舞歌)라고 알려진 조선말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 이후 옥산신사로 격하되었으며 건물 역시 1907년 일본식으로 개축된 채 남아있다.
오나리 오나리쇼셔(오늘이 오늘이소서)
마일에 오나리쇼셔(매일이 오늘이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리시고 (저물지도 새지도 마시고)
새라남(새더라도)
매양당식에 오나리쇼셔(늘 변함없이 오늘이소서)
- 신무가 가사
사쓰마니시키데(薩摩錦手)로의 발전
(칠보설륜문화병 赤地七宝雪輪文花瓶一対)
1648년 이래로 백사쓰마에 '니시키데' 기법이 더해진다.
'니시키데' 기법은 초벌구이 한 도자기 위에 다채로운 색채의 그림을 넣는 기법으로 사쓰마야키의 추세를 크게 좌우하는 의미를 가진다. 1863년 사쓰마와 영국 간 전쟁으로 인해 사쓰마의 요업 관련시설이 대부분 파손되었고, 나에시로가와의 백사쓰마는 니시키데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나에시로가와의 조선인들
나에시로가와의 사람들
「삼국명승도회(三国名勝図会」
1843(천보14)년
나에시로가와에서는 에도시대 동안 다른 곳에서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것은 보호와 통제의 이중정책이었다. 조선인 도공의 후손들은 일본식 이름이나 일본 의복의 착용 등을 금지 당했으며, 마을 사람들의 외부 유출 및 통혼은 전적으로 통제되었다. 그 대신, 일본인에 의한 마을침범이나 범죄행위는 엄벌로 다스렸으며, 무사신분에 준하는 대우를 함으로써 보상하였다.
이것은 ‘조선통사(朝鮮通詞)’로 불리는 통역 집단을 결성하고 대조선 무역 창구로서의 임무를 맡기기 위해서였으며, 한편으로는 영주 전용의 도자기 제조기술의 보안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조선 이름을 사용하고 조선의 의복과 조선의 말을 보존할 수 있었던 나에시로가와는 사쓰마 속에 존재하는 조선 마을과도 같았다.
사쓰마니시키데의 근대
(만국박람회)
1867년 일본이 처음으로 참가한 파리 만국박람회에 사쓰마는 일본과 별도로 독자적으로 참가한다. 여기에서 니시키데 대화병이 큰 호평을 얻음으로써 사쓰마야키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고 1873년 빈 만국박람회에서도 12대 심수관의 대화병이 진보상을 수상하게 되어 '사쓰마'는 일본도자기의 대명사가 되었다. 19세기 후반, 서구에서는 일본 도자기의 수집층이 일반인들에게도 퍼져 있던터라 금채와 채화를 구사한 호화로운 '사쓰마킨란데(薩摩金襴手)'가 세계를 석권하였다고 일컬어지며 사쓰마야키의 대수출시대가 막을 열게 되었다.